[을의 생존법] '을'이 되면 알아야 할 것들
" 이제 저와 똑같이 을이 되셨군요. 축하합니다. 직장을 나오면 보이지 않던 새로운 길이 열린답니다.”
얼마 전 요새 시끌시끌한 방송사 고위 간부에게 내가 한 말이다. 정들었던 직장에 사표를 던지는 일이 어디 쉬울까. 하지만 순리대로 30년 직장을 정리했다. 그분에 대해 생각해봤다. 과연 온실을 나와 을로 생존할 수 있을 것인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을의 조건인 겸손과 오픈 마인드를 지녔기 때문이다.
직장을 나오면 본격적인 을이 된다. 어느 날 주위를 둘러보면 그 많던 지인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나 혼자'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직장에서 을로 생활할 때와 전혀 다르다. 사업을 한다 치자. 직원들은 우군이 될지언정, 친구는 되지 못한다. 고민은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세상이란 망망대해, 그 막막한 바다 위에서 거친 파도로부터 배를 지켜내는 일은 고스란히 당사자의 몫이다.
내 배를 만들고 내 꿈을 펼치기 위해 바다로 나가는 일.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러나 고기를 잡지 못하면 배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다. 때론 암초를 피해야 하고 격랑과 싸워야 한다. 고기를 잡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고기를 잡을 방법도 알았으며, 고기도 잡았지만, 그 고기를 사줄 사람이 없거나 혹은 적거나 나아가 입맛이 변하게 되면 모든 게 무용지물이다.
사업의 첫 단계는 아이템을 선정하는 일이다. 어부가 되기로 했다면, 어떤 고기를 잡을 것이냐를 결정하는 일과 같다. 바다 쪽에서 일을 한 사람이라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훨씬 수월하다. 이어 기술을 배우고 자본을 투자해 배를 사면 일단 준비는 된 셈이다.
그런데 이미 바다에는 수많은 어선이 있으며, 나름대로 노하우로 겨냥한 고기를 잡아 올린다. 그 모습을 보면 정말 부럽고 신기한 느낌이 든다. 과거엔 한 번도 주목하지 않은 풍경들이다. 한 사업가의 말.
"한 식당에 갔습니다. 카운터에 식당 주인이 앉아있고, 종업원 몇 명이 음식을 나릅니다. 식당 주인이 '3번 테이블에 깍두기 하나 드려라'라고 말하면, 종업원은 '예, 예'하며 답합니다. 그 주인 모습이 그렇게 부러워 보입니다. ‘저 식당주인은 일찍 나와서 저렇게 자리 잡고 일하고 있구나.’ 종업원 네댓 명 정도 두면서 꾸려가는 식당 주인 능력이 정말 대단하게 보이는 거죠."
세상은 바다 위의 풍경과 똑같다. 그 어선들 속에 뛰어들어 먹고 살려면 남과 다른 경쟁력이 필요하다. 잘 되는 어선을 벤치마킹하고,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틈새가 어디에 있는지를 연구해야 한다. 아니면 신기술을 개발해 대량으로 잡을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해야 한다. 게다가 이미 진출한 선장들로부터의 견제를 뚫어야 한다.
"사업 시작할 때요? 말도 마세요. 아무 생각 없이 내가 생각한 분야에 뛰어들었습니다. 이쯤 되면 반응이 오겠지 했는데, 깜깜 무소식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다들 숨을 죽이며 나를 관망하고 있었답니다. '대체 저 녀석이 누구야. 어디서 온 놈인데 갑자기 우리 밥그릇을 뺏어 먹으려구해?' 그런 식입니다. 나 혼자 잘 났다고 우쭐대는 순간, 누군가는 나를 어둠 속에서, 비웃음 흘리며 지켜보고 있었던 거지요."
따라서 어종 선택에 주의를 해야 한다. 남들이 귀찮아서 잡지 않는 고기나 고급어종을 잡아야 할 것이다. 그러려면 계속 돈이 필요하다. 하지만 대개 을은 아이디어와 기술은 있되, 자본이 부족하다. 그럴수록 역설적으로 아이디어는 더 많다. 아이디어를 자본과 접목시키기 위해 을이 할 수 있는 일은 갑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을이 매일 하는 일 중 하나는 갑의 동태를 살피는 일이다. 갑이 낸 입찰공고를 매일 체크하는 것이다.
갑 역시 특별한 어종을 잡을 수 있는 을을 찾는다. 수십, 수백 개의 을이 일거리를 따내기 위해 갑 회사를 기웃거린다. 공고가 나면 을은 힘겹게 제안서를 만들어 넣고, 가슴 졸이며 결과를 기다린다. 그러나 초보 을은 입찰을 따내는 일 자체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대부분 관련된 일을 해본 경력과 자격을 묻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미 바다에 나가서 고기를 잡는 갑의 밑에서 하청, 혹은 하청에 하청을 받아가며 경력을 쌓는다.
갑을 향해 지겨울 정도로 제안서를 날리고, 이리저리 발로 뛰며 해당 분야에 적응해 나가면 일거리가 생긴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어부’로서 인정을 받으면, 바야흐로 바다에 내 배 하나를 띄워 생존할 수 있게 된다.
을이 되신 분들의 분투에 힘찬 성원을 보낸다.
[임정섭 칼럼니스트/‘을의생존법’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