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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목동 투쟁’으로 조직화된 철거민 운동의 역사

복돌이-박 창 훈 2008. 2. 10. 11:14
1984년 ‘목동 투쟁’으로 조직화된 철거민 운동의 역사
 

 

[한겨레] 1984년 ‘목동 투쟁’으로 조직화된 철거민 운동의 역사…1994년 두 단체로 갈라지며 온건과 강경 노선으로

▣ 길윤형 기자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을 지낸 손정목(77) 전 서울시립대 교수는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에서 “20세기 후반기 서울 도시계획 50년의 바탕에는 세 가지 축이 있었다”고 적었다. 첫째는 대량공급이었고, 둘째는 무허가건물 정비였으며, 셋째는 북의 남침에 대비한 ‘안보’ 개념이었다.

만원도시, 확장의 아비규환 속에서…

손 교수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1966년에서 1980년까지 15년 동안 서울에서는 489만3500명의 인구가 늘었다. 이를 15로 나눈 뒤 다시 365로 나누면 하루 평균 894명의 인구가 15년 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늘어난 셈이다. 첫째 축인 대량공급과 둘째 축인 무허가건물 정비를 위해, 정부는 해방 이후 전국 곳곳에 피난민들이 짓고 살아온 무허가 건물들을 철거했다.

1966년 2월 소설가 이호철이 <동아일보>에 ‘서울은 만원이다’라는 소설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그때 서울의 인구는 380만명이었고, 1인당 국민총생산은 126달러였다. 1960년대 중반 벌써 ‘만원’이 된 도시는 영동지구 구획정리 사업으로 강남을 파헤쳤고, 목동·개포·수서로 영역을 넓혀갔다. 상계동과 일산을 끝으로 북쪽으로 올라갈 곳을 찾지 못하는 도시는 점점 남쪽으로 발을 뻗어 분당·과천·산본·안양에서 이제 용인·천안까지 촉수를 넓혀갔다. 그 아비규환 속에서 철거민 문제가 불거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호 한국도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도시 철거투쟁의 역사는 70년대 청계천과 창신동의 철거반대 투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말했다. 특히 창신동 철거투쟁 때 꽤 많은 사람들이 서울시청에까지 몰려가 데모를 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철거민 투쟁의 주역 가운데 한명이 현재 민주노동당 대표로 있는 김혜경씨다. 1971년 용두동·마장동·숭인동 등의 집을 뜯고 경기도 광주로 사람들을 집단 이주시킨 ‘광주 대단지’ 사건으로 사회가 떠들썩해지기도 했다.

지역별로 이합집산을 거듭한 철거투쟁이 조직적으로 발전한 계기는 1984년 목동지구 택지개발사업(4.3㎢)이 시작되면서부터다. 목동 투쟁을 통해 ‘빈민의 벗’ 고 제정구 의원이 주도한 ‘천주교도시빈민사목회’(천도빈)가 설립됐고, 뒤이어 ‘기독교도시빈민선교협의회’(기도빈) 등이 생겨냈다. 지금은 익숙해진 ‘주거권’ ‘도시빈민운동’이라는 용어도 이때를 계기로 대중화됐고, 수많은 학생운동 세력이 철거투쟁에 결합하기 시작했다.

철거민들이 자생적인 조직을 만든 것은 1987년 ‘서울시철거민협의회’(서철협)가 생겨나면서부터다. 서철협의 초대 대표는 나중에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의장을 지내는 고광석씨였다. 이후 서철협을 물려받은 사람은 ‘동소문·돈암동 세입자 대책위원회’ 회장을 지낸 이태교(65)씨로 현재는 활동을 중단한 채 전철연 고문으로 칩거하고 있다. 이호승 전국철거민연합회 중앙회장은 “사람들이 단체쪽으로 몰려들자 야권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 등 정치권에서 힘을 합치자는 제의가 많이 왔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철거단체들은 왜 갈라섰는가

1980년대 말 서울 외곽과 경기도쪽에 대규모 택지개발 사업이 시작되면서 철거투쟁도 과격해지기 시작했다. 천도빈에서 활동하던 김영준씨와 상계동 철거민 김진홍씨 등이 서철협의 강성 투쟁노선에 반기를 들고 1990년 6월 ‘주거문제 해결을 위한 전국연합’(주거연합)을 결성했다.

주거연합은 처음에는 철거투쟁보다는 도시빈민의 주거권 문제에 집중하려고 했지만, 철거민의 상황이 여전히 열악했고, 서철협의 강성노선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후 주거연합은 온건하고 합리적인 주장을 펼치는 철거투쟁 지원조직으로 자리매김했다. 최근에는 임대주택법 개정 등 공공임대주택 문제에 설득력 있는 대안을 제시하고는 있지만, 현장에 뿌리내린 기층 조직으로서의 활력은 많이 위축된 상태다.

1989년 분당 택지개발 사업을 시작으로 도시는 남쪽으로 스스로를 확장했다. 이 가운데 경기 남부 지역에서 대규모 택지개발 사업이 줄을 이었고, 그에 따라 철거민들도 양산됐다. 분당세입자대책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이호승씨를 중심으로 1992년 10월24일 경원대학교에서 경기도철거민협의회(경철협)가 결성됐다. 이후 경철협은 1993년 6월28일 서울·인천·부산 등 전국 곳곳에 흩어진 철거단체들을 모아 전국철거민협의회(전철협)로 거듭났다. 이호승씨는 이 무렵 비리 추문으로 활동을 잠시 접었다가 1994년 3월께 전철협을 재건해 철거운동에 복귀했다.

그 와중에 경기와 서울 지역 철거민대책위원장 출신인 이태교, 남경남, 양해동, 고천만 등을 중심으로 전국철거민연합(전철연)이 결성됐다. 창립대회는 1994년 6월21일 서울 종로구 종묘공원에서 열렸다. 두 단체의 분열을 둘러싸고 전철협쪽에서는 “전철연이 전철협을 깨고 나왔다”고 주장하고, 전철연쪽에서는 “이호승이 느닷없이 철거운동 세력의 단합을 깨고 뛰쳐나왔다”고 맞서고 있다. 한때 철거운동 단체에 몸담았던 한 시민운동가는 “두 단체가 갈라서는 원인이 꼭 노선투쟁뿐만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분열 과정의 내막은 두 단체의 주장이 첨예하게 엇갈리지만, 노선 차이는 선명한 편이다. 전철연은 철거민을 노동자로 보고, 철거민을 사회 변혁을 위한 주체로 파악한다. 투쟁 과정에서 ‘골리앗’·사제총·사제화염방사기 등 폭력적인 수단 사용도 꺼리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을 사회의 기층 민중으로 자리매김하고, 전국노점상연합 등 민중세력과 연대해 단체를 발전시켰다. 전철연의 투쟁 목표는 영구임대아파트 수준의 싼 주택과, 그 집으로 들어갈 때까지 머무를 수 있는 가수용단지다.

전철협은 철거민 대책이 마련되면 다시 생업으로 돌아가야 할 사회적 약자로 파악한다. 이 때문에 폭력적인 비타협 노선보다는 대화와 정책 대안을 앞세운 문제해결을 목표로 삼는다. 전철협은 시민·사회단체 연대회의에 가입한 시민단체로 민중운동보다는 시민운동 세력과 공동 투쟁을 지속해오고 있다. 지금은 ‘성경적 토지정의를 위한 모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등과 함께 토지정의실천시민연대를 만들어 토지공사-주택공사 개혁 촉구 등을 외치며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들의 목표는 5년 뒤 매입할 수 있는 국민임대아파트 제공과 가이주단지 제공이다. 분열 이후 10년 동안 두 단체 가운데 하나는 민중운동단체로, 다른 하나는 시민단체로 서로 다른 ‘두 개의 길’을 간 셈이다.

2002년 전철연에서 빠져나온 빈철연

이 밖의 철거민 단체로는 2002년 말 결성된 ‘빈민해방철거민연합’(빈철연)이 있다. 빈철연은 전철연이 자신을 추종하는 사람들 위주로 지역 철대위 지도부를 강제로 교체하려 했던 2002년 7월 ‘안암동 철대위 사건’의 여파로 전철연을 탈퇴한 사람들이 모여 만들었다. 빈철연 결성을 주도했던 사람은 이영철 안암동 철대위원장으로 “전철연과는 달리 철거민을 위한 조직을 만들겠다”는 목표로 황학동 삼일아파트, 하왕십리, 도봉동 등 철거민들을 규합했다. 이후 전철연에 잠시 몸담았던 묵동 철대위원장이었던 가제웅씨를 지도위원으로 불러와 조직을 만들었다. 빈철연은 이후 △종로구 창신·숭인동 삼일아파트 △강남구 포이동266 일대 비닐하우스촌과 △용산 5가동 재개발 사업 철거민 투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임대아파트 쟁취 투쟁을 이끌었지만 전철협이나 전철연에 견줘 조직의 규모는 작은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