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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질주하는 역사 철도·2]비내리는 어느 가을날의 인천역

복돌이-박 창 훈 2010. 10. 15. 19:20

[질주하는 역사 철도·2]비내리는 어느 가을날의 인천역

경인선이 시작되고 끝나는 곳… 열차는 설렘을 되풀이한다

 

 
▲ 인천역 전경

[경인일보=글/조성면(문학평론가·인하대 강의교수)]여행보다 훌륭한 스승은 없다던가. 세상에 대한 깊은 이해는 물론 심신 재충전의 기회를 제공해 주며 여기에 추억을 덤으로 얹어주니 이보다 남는 장사가 어디 있으며, 이렇게 훌륭한 멘토가 세상에 또 어디 있으랴.

그런 여행이라면 철도와 기차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어느 날 문득 간단히 짐을 챙겨 시동만 걸면 훌쩍 떠날 수 있는 자동차 여행은 왠지 여행이라기보다는 레저이며 휴가에 더 가까울 것 같다. 여행에는 기차가 제격이며, 기차야말로 여행의 대문자이다. 몇 차례의 클릭으로 용건이 전달되는 이메일이나 모바일 문자를 편지가 아니라 메시지라 해야 하는 것처럼 배낭을 둘러메고 레일 위를 달려도 보고 길을 묻는 절차를 밟는 것이 고전적인 여행의 형식일 것이기 때문이다.

날마다 1호선 전동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에게 전철은 여행이 아닌,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것처럼 사소한' 일상이다. 그러나 불과 몇 정거장 차이인데도 전철을 타는 것이 사소한 일상이 아닌 여행처럼 느껴지는 곳이 있다.

   
▲ 인천역이 마주보고 있는 차이나타운 입구

경인선이 시작되고 끝나는 인천역. 허벅지 근육이 뻑뻑해질 만큼의 계단을 오르내리거나 에스컬레이터를 타는 일 없이 광장에서 플랫폼까지 일직선으로 걸어가서 원하는 자리에 앉을 수 있는 곳. 굳이 자장면·차이나타운·자유공원·월미도를 떠올리지 않아도 교외선의 한적함과 가벼운 고독같은 것을 느낄 수 있는 인천역. 그곳에는 아직도 여행의 설렘같은 것이, 여행의 아우라가 남아 있다.

10월 초입부터 인천역에 가을비가 촉촉하게 내린다. 꼭 인천역이 아니더라도 이런 날에 플랫폼에서 기차를 기다리노라면 일본의 프로 시인 나카노 시게하루(中野重治)의 '비 내리는 시나가와역(雨の降る品川驛·1928)'이 떠오른다. 긴 기적 소리와 함께 우연 속으로 떠나가는, 추방되는 조선인 동지들을 전송하는 이 저항의 서정시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전경화하는 것은 어인 연유인가. 벌써 머리에 옅은 서리가 내려앉기 시작한 중년의 승객에게도 아직 문학 청년의 열정과 낭만이 남아있음인가.

   
▲ 인천역에서 열린 경인철도 개통식, 멀리 월미도가 보인다.

인천역이 마주보고 있는 차이나타운과 자유공원은 본래 응봉산(鷹峯山)이었다. 개항장이 들어서면서 이 인천역과 응봉산 일대의 선린동·신포동·신흥동 등지에 중국·일본·미국·러시아·프랑스·독일 등 각국지계(各國地界)들이 빼곡히 들어섰으며, 1888년 만국공원이 조성됐다. 엄연한 지계였음에도 이들은 제멋대로 이를 조계처럼 활용했다. 조계는 컨세션(concession)이라고 해서 외국인의 배타적 치외법권 지역이고 지계는 세틀먼트(settlement)라고 하여 매년 소정의 돈을 받고 임대해 준 지역을 말하는 것이니, 엄연히 다르다.

각국지계는 만국지계라고도 했으며, 여기에 들어선 만국공원은 당시 세관의 토목기사였던 러시아인 사바찐(A. I. S. Sabatin)이 택지를 조성하면서 공원을 만들고 그 이름을 공용정원(public garden)이라고 부른데서 비롯됐다고 한다. 그러다가 1957년 개천절날 이승만 정부가 맥아더 동상 제막식을 갖고 공원의 이름을 다시 자유공원으로 부르면서 응봉산의 이름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더 멀어져 갔다.

응봉산은 1908년 무렵부터 한동안 오포산(午包山)이라고도 했는데, 그것은 이곳에 대포를 설치해 놓고 12시 정각마다 공포를 쏘았기 때문이다. 시각을 알려준다는 명분 아래 오포를 쏘았다고 하지만, 사실 매일 같이 느닷없이 귀청을 울리는 대포소리는 소음이고 짜증스러운 스트레스였다. 스트레스의 차원을 넘어서 식민지인들에게 가하는 무언의 협박이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비록 유보라는 단서를 달긴 했지만 최근 경찰청이 시위진압용으로 지향성음향장비(LRAD)라는 이른바 음향대포를 도입하겠다고 예고한 터라 승객의 마음은 더욱 싱숭생숭하다. 어떤 역사 시대를 기다려야 귀의 평화와 고요의 축복이 깃들 것인가.

오포에, 사상 최대의 함포 사격에, 음향대포 소식에 뿌리 깊은 역사적 상흔과 차이나타운이 주는 이국성까지 비 내리는 가을 오후, 온갖 역사적 기억들이 퇴적돼 있는 인천역에서의 상념은 갈피없이 뻗어 나간다.

   
▲ 인천역 내부의 개찰구 모습

그래도 인천역 주변에서는 안이비설신의 육근을 자극하는 작은 기쁨이 기다리고 있다. 3대째 청요리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대창반점과 풍미반점 등 미각을 자극하는 전통적인 레시피들이며, 도원결의·적벽대전 등 '삼국지연의'의 주요 장면들을 묘사한 타일 벽화, 그동안 삶의 논리가 억압해 왔던 내 마음속의 어린 아이를 일깨우는 중국과자 월병(月餠), 그리고 특색있는 근대 건축물들과 역사성은 놓칠 수 없는 작은 기쁨들이다. 인천역은 마치 비루한 현실에서 짜릿한 모험의 세계를 향해 열려있는 런던역 9와 4분의 3 승강장같은 판타지 게이트-곡절 많은 한국 근·현대사의 복판을 향해 뚫린 역사의 관문이라 할 수 있다.

인천역의 랜드마크이자 역사탐방의 관문인 패루(牌樓) '중화가'가 웅변하듯 이곳은 한국 화교의 정신적 거점이었다. 임오군란때 오장경 제독과 함께 묻어 들어왔다는 화상(華商)들. 원세개와 북양대신 이홍장의 적극적인 비호와 1920년대까지 중계무역상으로 유명한 거상 동순태의 권위에 힘입어 번창했던 '비단이 장사 왕서방들'이 바로 인천 화교의 한 기원이었던 것이다. 비록 1916년 무렵부터 조선총독부에 의해 인천·부산·원산 등을 포함한 몇몇 지역으로 거류지가 제한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한국 화교는 상업 집단이었기 때문에 경제활동을 하는데 큰 제약은 없었다는 것이 대체적인 중론이다. 역사적으로나 지정학적으로 이렇게 인천역 일대는 화교들의 중심지-아니 한국 국제화 1번지, 다문화 1번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인천역에서 낯선 곳을 찾았을 때마다 생겨나는 설렘과 가벼운 긴장감 그리고 답사의 즐거움 같은, 이른바 여행의 아우라를 느꼈던 것은 아마 이런 이유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숱한 역사적 사건들과 기억을 안고 있는 곳. 경인선이 시작되고 끝나는 곳. 이곳 인천역이 어둔 역사시대를 마감하는 종착역이 되고, 상생과 평화라는 위대한 역사시대를 열러 가는 시발역이 되어주길 조용히 축수해 본다.

비 내리는 가을 오후. 먼 길을 달려온 경인 전철이 출발 신호음과 함께 어김없이 다시 길을 나선다.

출처 : 동북아의허브-인천-
글쓴이 : 복돌이(박창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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