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값 하락세라지만…호가는 멈춰 있고 하방경직성이 강해졌다
집값 하락세라지만…호가는 멈춰 있고 하방경직성이 강해졌다
ㆍ사고 싶은 집·통계에 잡힌 집 ‘가격 괴리’ 보태져 체감도 낮아
ㆍ급상승했다 천천히 내리는 현상도…“비수기 지역별 편차 커”
대구에 사는 박모씨(38)는 최근 직장 문제로 서울의 집을 알아보다가 깜짝 놀랐다. 지난해 1월만 해도 5억원 후반대였던 영등포구 ‘영등포푸르지오’(전용면적 73.133㎡) 가격이 8억원가량으로 뛰었기 때문이다.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공개시스템을 찾아보니 현재 시세는 집값이 최고점이었던 지난해 11월(7억9500만원) 수준 그대로였다. 박씨는 “집값이 하락세라고 하던데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며 “도대체 어디가 떨어졌다는 것이냐”고 말했다.
지난해 ‘9·13부동산대책’ 발표 이후 집값이 하락세로 돌아섰다는 각종 통계가 이어지고 있지만 정작 시장에서는 집값 하락을 체감하기 어렵다는 말들이 나온다. 오히려 신고가를 경신하는 단지들도 계속 나오고 있다. 통계와 현실의 괴리는 왜 일어나는 것일까.
■ 표본조사의 한계
한국감정원이 매주 발표하는 ‘주간 아파트 가격동향’을 보면 지난 21일 기준 서울 아파트값은 전주 대비 0.11% 떨어졌다. 지난해 11월12일(-0.01%) 이후 11주 연속 하락세로, 낙폭도 전주(-0.09%)보다 커졌다. 수도권(-0.07%)과 지방(-0.09%) 모두 떨어져 집값은 전국적으로 0.08% 하락했다.
그러나 감정원 통계는 전수조사가 아니라 아파트 7400가구를 대상으로 한 표본조사라는 맹점이 있다. 표본아파트는 지역·면적·층수 등을 고려해 선정한다. 전체 가격 동향이 하락세일지라도 주택 수요자들이 개별적으로 관심을 갖는 특정 아파트 가격은 다른 양상을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집값이 단기간에 가파르게 상승한 것에 비해 하락세는 완만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도 체감도가 떨어지는 이유 중 하나다.
감정원 자료를 보면 지난해 서울 집값은 6.2%나 급등했다. 집값이 고공행진하던 지난해 8월 강남·서초·송파·강동 등 강남 4구의 상승률은 매주 0.60% 안팎까지 치솟기도 했다. 하지만 하락폭은 대개 0.10%대로 상승폭에 비하면 ‘찔끔’ 수준이다.
특히 하락세가 서울 전역이 아닌 강남 등 재건축 단지를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강남(-0.25%), 마포(-0.23%), 양천(-0.16%), 강동(-0.16%), 송파(-0.15%) 등 현재 대규모 재건축이 추진 중인 곳들과 달리 금천(-0.03), 동대문(-0.05%), 은평(-0.05%) 등의 낙폭은 미미하다. 서울 마포구 공덕동의 공인중개사 ㄱ씨는 “재건축 단지는 투기 수요가 몰려 단기간에 가격이 가파르게 상승하지만 하락할 때도 직격탄을 맞는다”며 “상대적으로 실수요가 받쳐주는 다른 지역들은 집값 변동폭이 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 급매물이 만드는 착시
공인중개사들에 따르면 최근의 하락장세는 이전과 다른 경향을 보이고 있다. 과거에는 10억원에 거래가 이뤄지면 다음 매도자가 9억8000만원에 매물을 내놓고, 그다음 매도자는 9억5000만원에 매물을 내놓는 식으로 집값 하락이 진행됐다. 하지만 지금은 호가(집주인이 부르는 가격)가 일정 수준에서 멈춘 상태로, 집값이 단계적으로 빠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급매물이나 특수하게 거래된 1~2건이 통계에 반영돼 전반적으로 집값이 떨어진 것처럼 착시효과를 일으킨다는 분석이 나온다. 서울 송파구 잠실의 공인중개사 ㄴ씨는 “지난달 ‘잠실리센츠’(전용면적 84㎡)가 13억5000만원에 거래된 적이 있지만 가족 간 증여였고, 해당 아파트의 호가는 여전히 16억원대”라며 “이달 2억원가량 싸게 팔린 ‘잠실엘스’(전용면적 84.8㎡)도 있지만 급매물이라 이례적으로 잔금 날짜도 앞당긴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호가는 매도자의 ‘버티기’가 공고해지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감정원 관계자는 “사람들은 집값이 한번 올라가면 그것을 적정가로 생각한다”며 “갈수록 하방경직성(집값 하락을 저지하는 경향성)이 강해져 시장이 좋지 않아도 그 가격대를 고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집값은 결국 우상향한다’는 학습효과 때문으로 보인다. 시중에 유동성은 넘쳐나지만 올해 추가적인 금리 인상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 많은 데다, 서울 지역은 주택 수요가 탄탄해 집값이 크게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동의 공인중개사 ㄷ씨는 “지난해 4월에도 가격이 잠깐 빠졌다가 가파르게 상승했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러지 않겠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며 “올해는 경기가 어렵고 내년에는 총선도 예정돼 있어 정부가 민심을 달래기 위해 부동산 경기 부양책을 쓰지 않겠냐고들 한다”고 말했다.
■ 실제로는 떨어지지 않았다?
본격적인 하락장세가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분석도 있다. 부동산정보서비스업체 ‘직방’이 지난해 8월과 12월에 서울 지역에서 거래된 같은 단지, 같은 면적 아파트 513개의 실거래가를 분석한 결과, 광진·서초·송파구에서만 집값이 보합·상승보다 하락한 가격에 거래된 경우가 많았다. 나머지 22개 자치구에서는 12월에 거래된 사례 중 8월과 비교했을 때 보합이나 상승한 가격으로 이뤄진 경우가 더 많았다는 의미다.
광진구에서는 거래가 성사된 10건 중 6건이 하락한 가격으로 계약이 이뤄졌다. 서초구에서는 거래된 11건 중 6건이 8월보다 떨어진 가격으로 거래됐다. 송파구는 거래된 23건 중 12건이 하락, 11건은 상승한 가격으로 계약이 맺어졌다.
용산·종로·중구에서는 거래 자체가 많지 않았으나 8월보다 떨어진 가격으로 계약이 이뤄진 경우는 단 한건도 없었다. 오히려 모든 계약이 다 오른 가격으로 이뤄졌다. 이들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거래가 많이 이뤄진 곳에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같은 기간 노원구와 도봉구에서 각각 86건, 45건의 매매거래가 이뤄졌지만 하락한 가격에 계약한 비율은 각각 10%, 16%에 불과했다. 대부분은 상승한 가격으로 계약이 성사됐다. 강북의 대표 인기지역인 마포구와 성동구에서도 떨어진 가격에 거래된 비율은 각각 30%, 29%밖에 되지 않았다.
함영진 직방 빅데이터랩장은 “현재 주택시장은 ‘집값이 더 떨어질 것’이라는 매수자 관망세와 양도소득세 부담 등으로 ‘조금 더 두고 보자’는 매도자 심리가 합쳐져 거래가 많지 않은 상황”이라며 “아직 비수기인데다 가격조정이 지역에 따라 편차가 크다 보니 실수요자들이 집값 하락을 크게 못 느끼는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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